[이종학 - 오디오 평론가] 아마도 일본 오디오라고 하면, 미니 컴포넌트부터 떠올릴 분이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전자제품 코너 한쪽, 말하자면 음향기기쪽에 일본산 제품이 다수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제품을 만들기는 하지만, 브랜드의 숫자나 제품의 종수에 있어서 확실히 일본이 남다르다. 과연 전자제품의 메카다운 위용이다.

그러나 일본이 오로지 이런 저가형 컴포넌트 시스템만 만드는데 그치고 있을까? 전세계 경제 대국 3위의 위치에 있으면서, 오래 전부터 수많은 명품 오디오를 수입하고 있는 마당에, 자국의 풍부한 시장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저가형 제품만 몰두하고 있을 것이라 판단하기는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맞다. 일본은 수입 오디오 못지 않게 자국내 생산품에도 신경을 기울이고 있으며, 일부 브랜드는 해외에서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 이번 기회에 그 실체를 좀 파악해보기로 하자.

사실 1970~80년대만 해도, 오디오 생산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위상은 상당했다. 그 때엔 전세계적으로 오디오 붐이 일기도 했지만, 삼성, LG 등 대기업이 주축이 되어 일종의 혼수품으로 오디오 시스템이 추천되기도 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본다면 놀랄 일이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TV를 사고, 세탁기를 구매하고 나면 오디오가 따라붙는 식이었다. 그 다음이 에어콘이고 마지막이 마이 카, 바로 승용차였다.

아무튼 오디오 제조 부문에서 우리나라도 꽤 상당한 실력을 보유했었다. 인켈과 같은 괜찮은 음향기기 메이커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해외의 고급 브랜드에 OEM으로 납품하는 중소 기업도 꽤 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마치 썰물이 빠지듯, 혼수품 목록에서 오디오가 제외되자마자 우리의 오디오 시장은 사라졌다. 아주 짧은 순간 찬란한 광채를 빛낸 후, 소리 소문없이 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당시 경쟁자였던 일본은 여전히 고급 오디오(하이엔드라고 부른다) 부문을 놓지 않고 있고, 대만은 일찌감치 중국에 진출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오디오를 움켜쥐고 있었더라면, 지금의 상황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일본 오디오를 소개하면서, 우리의 상황이 떠올라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본 기획은 총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 오디오 하면, 대기업들이 먼저 떠오르고, 자연스럽게 소니, 파나소닉, JVC 등을 떠올릴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이미 충분할 터이므로, 아직 국내에 덜 알려진 숨은 강자들 중심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총 10개의 브랜드를 알릴 예정이며, 우선 1부에서는 아큐페이즈, TAD, 야마하를 다루도록 하겠다.

1. 아큐페이즈(Accuphase)

아마도 재팬 오디오를 말할 때, 제일 처음 언급해야 할 브랜드가 아큐페이즈일 것이다. 회사명은 영어로 “정확한”(Accurate)과 “위상”(Phase)의 합성어. 기술지향적인 메이커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정교한 레이 아웃, 빼어난 퍼포먼스, 흠잡을 데 없는 외관 등, 단순히 음질을 떠나 거의 일본의 장인이 최상의 기술을 발휘해 만든 작품을 연상시킨다. 또 내구성이 뛰어나 오래 전에 생산된 모델도 엄연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www.accuphase.co.jp

동사가 설립된 해는 1972년 1월. 어릴 적부터 최고의 오디오 기기를 만들고 싶다던 카스가 나카히로 및 지로 형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 그들은 이미 50대 중반에 이르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한 차례 창업을 해서 성공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회사를 너무 키워놨다는 점. 이미 안락한 미래가 보장된 환경이지만, 역으로 자신들이 이상으로 삼는 기기를 만들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미련없이 퇴사하기에 이른다. 아니 회사를 내던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설립한 것이 바로 켄소닉. 이후 10년 후에 정식으로 아큐페이즈가 된다.

동사의 회사 이념은 소수 정예주의다. 이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따라서 일절 주식 공개도 하지 않고, 명성에 걸맞는 대량 생산도 배제한다. 매년 25억엔 정도의 매출을 올리는데, 그 이상을 바라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서 독일의 히든 챔피언이 연상되기도 한다.

실제로 전자 제품이나 공업 기계에 대한 독일의 높은 자존심은 알아줄 만하다. 그만큼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독일 메이커가 많다. 이런 독일에서 유일하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아큐페이즈다. 독일이 인정할 정도라고 하면, 아마 충분히 판단이 될 것같다.

아큐페이즈는 철저하게 R&D를 중시한다. 또 시장이나 딜러의 상황과는 별개로, 엔지니어들의 기를 최대한 살려준다.

“좋아하는 일을 해라. 만들고 싶은 제품을 만들어라.”

이쯤 되면 회사에 출근하는 일이 즐겁지 않을까?

1973년에 C200 프리, P300 파워 그리고 T100 튜너를 발표한 이래, 꾸준한 진화를 이룩하고 있다. 여기에 CD 플레이어 정도가 첨가될 뿐, 일절 다른 컴포넌트를 만들지 않는다. B&W, JBL, 탄노이 등 해외 유수의 명 스피커들과 궁합이 좋아서, 실제로 일본의 대표적인 오디오 잡지 <스테레오 사운드>에선 레퍼런스 기기로 아큐페이즈를 고정시켜놨다. 우리나라에서도 꽤 알려져 있었서, 신품이건 중고건 꾸준히 거래되는 상황이다.

2. TAD

TAD는 철저하게 기술 중심적인 회사다. “Technical Audio Device”의 약자인 TAD를 회사명으로 삼을 정도면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소수 정예, 그것도 거의 한 두 사람에게 제작이 밀집된 상황이지만, 이런 장인의 솜씨가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백 그라운드가 있다. 바로 파이오니어다. 즉, TAD는 파이오니아 산하의 전문적인 오디오 브렌치인 것이다.

© 2019 TADL. All Rights Reserved

지금이야 파이오니아는 다양한 전자 제품을 만드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창업 당시인 19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철저하게 오디오, 그 중에도 스피커에 집중되어 있었다. 창업자인 마츠모토 노조미씨는 전형적인 엔지니어로, 스피커 중에서도 드라이버 개발에 많은 열정을 바쳤다. 덕분에 일본 최초의 다이내믹 스피커 A8을 발표했고, 이후 풀레인지, 동축형, 혼 타입 등 다양한 드라이버를 개발했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1975년 TAD가 창업하기에 이르는데,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바로 미국 JBL에서 활약한 버트 바칸시를 기술 고문으로 위촉한 것. 그의 지침에 따라 드라이버부터 스피커 제조 전반에 이르는 기술과 이념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그의 지독한 완벽주의는 지금까지 사훈으로 당당히 이어지고 있다.

당초 TAD는 프로페셔널쪽에서 주로 활약했지만, 2007년에는 컨슈머 시장, 즉, 일반 오디오파일을 대상으로 영역을 넓혔다. 이래서 발표한 R1이란 스피커는, 즉각 전세계 오디오계에 강력한 충격을 전해줬다. 특히, 베릴륨을 소재로 한 트위터는 실제 연주회장에서 듣는 음과 다를 바가 없는 바, 그 제조 과정이 지난하고 또 까다롭다. 이 기술을 한 걸음 더 발전시켜 미드레인지까지 베릴륨 소재로 완성한 것이다. 이 제품이 나오고 1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베릴륨 미드레인지를 발표한 회사는 없다. TAD의 높은 기술력을 실감하게 한다.

한편 동사는 앰프, CDP도 함께 만들고 있다. 이것은 단 한 명의 장인, 그것도 여성이 담당하고 있다. 신구 아야라는 분이 그 주인공인데, 최고의 정밀도를 추구한 솜씨는 제품 하나하나가 단순한 상품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한다. 오죽하면 그녀의 작업장을 “장인의 고립 공예관”이라고 부를까?

따라서 TAD는 소스기부터 스피커에 이르기까지 오디오를 이루는 전 품목을 아우르지만 제품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또 이렇게 TAD로 완벽하게 라인 업을 짜서 재생되는 음에 대해 이런 평가가 뒤따른다.

“무미의 맛”. 즉, 맛이 없는 듯, 개성이 없는 듯 하면서 깊은 맛이 있는 것이다. 일본의 소바나 생선회가 그렇고 우리의 밥이나 국수가 그렇다. 그래서 또 질리지 않고 평생 먹지 않는가? 이런 점을 고려하면 TAD의 음향 철학에 공감할 요소가 많다고 본다.

참고로 TAD는 제품을 개발한 후,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에 이른 다음에는 일체 리스닝 테스트를 실시하지 않는다. 이미 개발 단계에서 완벽한 설계가 이뤄져서 굳이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일면 오만하기도 하면서, 더욱 믿음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3. 야마하(Yamaha)

야마하라는 회사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오토바이라던가 보트, 악기 등을 만들고 또 레조트 사업도 하고 있다. 대체 이 회사의 아이덴티티가 뭐란 말인가 의문이 따른다. 이에 대해 동사는 “레크레이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일종의 휴식이나 힐링을 할 때 필요한 디바이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디오 역시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것이다. 쉴 때 제대로 쉬어야, 일할 때 제대로 한다, 뭐 그런 철학을 갖고 있는 셈이다.

© Yamaha Corporation

사실 야마하는 AV 리시버, 즉 홈 씨어터에 필요한 멀티 채널 앰프에 특화되어 있다. 이 분야에선 가장 경험이 많고, 다양한 소프트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 기반에는 2 채널 오디오, 이른바 하이파이가 자리잡고 있다. 즉, 하이파이가 강해야 멀티 채널이건 라이프스타일이건 방계 기술을 아우를 수 있는 것이다. 뜬 금 없이 사운드 바를 내놓고 또 어느 날 휴대용 스피커를 내놨다가 갑자기 단종시키는 우리 업체들의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면, 여러 면에서 야마하는 귀감이 된다.

야마하가 창업한 시기는 1887년. 당시 풍금이라고 불리는 악기를 수리 및 제조하면서 출발했다. 이후, 국민 교육이 평등하게 실시되어 초등학교가 다수 설립되고, 거기에 필수적으로 풍금이 자리하면서 회사는 쭉쭉 성장하게 된다. 기타, 피아노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메이커로 이미지를 확립한 것은 20세기 초. 정말 연혁이 오래된 회사다. 또 이를 바탕으로 1954년에 본격적으로 오디오 산업에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전자 올갠도 만들어서, 일렉트로닉스쪽에 많은 기술을 축적함에 따라, 오디오 생산 부문도 활기를 띠어 갔다. 무엇보다도 악기 제조를 바탕으로 한 “음악의 음”을 추구하는 이념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1974년에 세계 최초로 베릴륨 소재를 진동판에 쓴 NS1000M을 발표해서 큰 명성을 얻었고, 이후 홈 씨어터 부문에도 진출, 최고의 노하우를 갖춘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최근에 하이엔드 스피커계에 큰 충격을 준 NS5000의 발표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무려 8년간에 걸친 연구 끝에 탄생했는데, 그 핵심은 이상적인 진동판의 추구다. 이로써 자일론(ZYLON)이라는 물질이 개발되는 바, 일체 왜곡이 없고, 리스폰스가 뛰어난 드라이버를 개발하게 된 것이다. 일설에는 미국 나사(NASA)에서 연구한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고 하니, 가히 항공우주공학과 관련된 거대한 프로젝트라고 해도 좋다. 또 이와 매칭할 수 있는 앰프와 CDP, 턴테이블도 속속 발표되어 요즘 승승장구하고 있다. 야마하, 하면 아무래도 보급형 컴포넌트나 AV 리시버 메이커라는 인상이 강한데, NS5000을 접한다면 크게 한 방 먹을 것이다.

- 이종학 평론가의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hnlove